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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만에 빠지면 ‘근원적인 정체성’ 깨닫을 수 없어 [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 6. 하느님의 구원경륜③- 인간은 초월적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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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대천동성당 댓글 0건 조회Hit 247회 작성일Date 22-02-05 17:13

    본문

    022.01.01 발행 [16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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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은 천사처럼 존귀하게 빛나기도 하지만, 자아가 교만에 빠져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을 경우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림은 삶의 첫 자리를 하느님께 내어드린 성모님의 신앙 태도를 볼 수 있는 안젤리코 작 ‘주님 탄생 예고’. 출처=가톨릭 굿뉴스



    성경의 가르침대로 인간은 위대한 존재이지만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이며, 천사처럼 존귀하게 빛나기도 하지만 동물보다 더 하찮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양면적인 특성을 지닌 인간이 하느님의 집(모상)으로써 자기 자신을 깨닫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할 수 있게 하는 핵심 요소는 무엇인가? 바로 인간의 초월적인 능력이다, 즉 인간은 ‘자의식’과 ‘자유의지’라는 초월적인 능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동물과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자의식과 자유의지 지닌 초월적인 존재

    2016년 구글 딥마인드(DeepMind)가 개발한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상대로 바둑 경기에서 승리한 사실이 세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알파고의 승리 결과는 바둑처럼 경우의 수가 많은 복잡한 게임이라 할지라도, 딥러닝을 탑재한 인공지능(AI)을 더 이상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해진다 해도 그것의 알고리즘을 만드는 것은 여전히 사람이다. 또한 인공지능이 구조적인 면에서 인간을 넘어설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예를 들면 아주 복잡한 연산 문제가 있을 때, 사람은 그 답을 모른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인공지능은 사람처럼 자신이 무엇을 알지 못하는지 빠른 답을 도출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사람에게는 인공지능의 능력과는 차원이 다른 ‘메타인지’, 즉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초월적인 자아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기능적인 능력 면에서 인간을 앞설 수는 있지만, ‘메타인지’를 가진 인간을 지배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점은 ‘인공지능’의 득세나 과학발전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특별한 선물인 ‘초월적인 자의식’, 즉 ‘자아’가 교만에 빠져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는 영적이고 윤리적인 불순종을 경계해야 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법이나 자연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가치 중립적인 과학발전은 우리에게 독이 되어 우리 생존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의식’ 외에 또 다른 영적인 능력인 ‘자유의지’를 선사하셨다. 인간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타인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 고귀한 결단을 할 수 있는 존재이면서도,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6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가스실의 연기로 사라지게 하는 부조리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 이하의 형태로 떨어질 자유도, 자기 자신의 결단을 통해 더 높은 신적인 형태로 다시 태어날 자유도 모두 인간 자신에게 있다. 이렇게 인간은 한계 지워지지 않은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의 본성을 확정해 가는 존재이다. 요컨대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 갈 영예와 의무를 처음부터 타고났다. 이토록 고귀한 자유의지를 올바로 행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 자기 자신의 참된 정체성이 형성되어야 한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부여되는 정체성

    한 인격의 주체로서 ‘초월적인 자의식’과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은 관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간다. 원래 정체성이란 개념은 영어로 아이덴티티(identity)라고 하는데 이는 ‘동일함’을 뜻하는 라틴어 이뎀(idem)에서 비롯되었다. 나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 즉 ‘나는 누구인가?’라고 할 때, 이것은 ‘나’라는 존재와 ‘무엇’이 동일시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먼저 ‘나’라는 존재를 생각해보자. 어릴 적 ‘나’와 지금의 ‘나’는 외형이나 성격적인 면에서 분명히 다르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가 동일하다고 여기는 것은 자기 동일성을 갖게 하는 ‘자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의식은 “내가 누구인가?”, 즉 ‘나’와 등가 되고 동일시되는 대상으로 나아간다. “나는 사제다”, “나는 부모다”, “나는 학생이다” 등등 나와 동일시되는 대상들이 여럿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직업이나 타인과의 관계, 신분 등을 나와 동일시하면서 부여하는 정체성이지, 나의 ‘근원적인 정체성’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부여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내실 때, 우리에게 영적인 존재로서 고유한 인격을 부여하셨다. 따라서 하느님과 우선적인 관계를 맺고 하느님을 우리 삶의 첫 자리에 모실 때, 그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닫게 될 때, ‘근원적인 정체성’이 형성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 그 이유는 교만함 때문에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여 ‘근원적인 정체성’이 형성되지 못한 결과이다.

    성경은 인간이 초월적인 존재임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인간을) 천사보다는 조금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시편 8,6) 이 구절은 하느님과 소통하고 일치할 수 있도록 인간만이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의미한다. 영적인 존재로 창조된 우리 자신을 잘 돌본다는 것은 하느님을 우리 영혼의 첫 자리에 모시고 하느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자신의 근원적인 정체성을 깨닫는 것이다. 성모님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근원적인 정체성을 깨달았기에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루카 1,38) 여기서 삶의 첫 자리를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성모님의 신앙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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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평만 신부(가톨릭중앙의료원 영성구현실장 겸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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